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진 문자 (문단 편집) == 여담 == 주로 비석, 청동 도구, 일부 그림들에 이 문자가 새겨져 있다.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는 [[거란어]], [[여진어]], [[만주어]]를 번역할 줄 알며, [[거란 문자]]와 여진 문자를 번역한 자료도 있다. [[유니코드]]에 2023년 기준으로 아직 여진 문자가 등재되지는 않았다. 비슷한 포지션인 [[서하 문자]]나 [[거란 문자]][* 다만 거란 문자의 경우 일부만 유니코드 전산화가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는 거란 소자만 유니코드에 등재된 상태이고 아직 거란 대자는 유니코드에 등재되지 않았다.]가 등재된 것과 비교하면 아직 전산화가 지진부진한 상황이다. 다만 앞으로 거란 대자와 함께 유니코드에 등재될 계획이 잡혀있으며 문자를 할당할 공간이 미리 마련해 놓기는 했고, 2009년 이래로 여진 문자를 유니코드에 추가하기 위해 학계에서는 문자를 정리하고 체계화시키는 등의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단 현재 여진 문자를 전산화 하기 위해서는 [[구결]]처럼 [[PUA]]를 이용해 표기하는 중이며, 장기적으로는 유니코드 사용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알려진 여진문자 비석 12기(基) 가운데 2기가 당시 [[금나라]]-[[원나라]] 땅이던 [[함경도]]에 세워졌다. 1338년 세워진 [[북청군]] 성대면 창성리의 북청 여진문자비(女眞文字碑)가 있고, 한편 12세기 중엽에 세워진 [[경원군]] 아산면 수정동의 여진문자비는 1918년 일제에 의해 경성으로 반출되어 지금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병자호란]] 이후에 세워진 [[삼전도비]]에도 여진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실은 [[청나라]] 시대에 개발된 [[만주 문자]]이다. >의정부에서 예조의 질문에 의하여 아뢰기를, '''“여진(女眞)의 문자(文字)가 장차 폐절될 것을 우려하여, 일찍이 생도 6명을 설치하고 부사정(副司正) 혹은 대장(隊長)의 체아직 한 자리를 주게 하고는 오로지 이를 연습하게 하였사온데, 뒤에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객지에의 우거(寓居)의 곤란을 말하여, 그의 분번(分番)을 들어 주고 1년 만큼 서로 체번하게 하였던 바, 수가 적은 생도가 번을 나누어서 오르내리게 되므로, 혹은 하기도 하고, 혹은 중단하기도 하여 진실로 온당치 않사오니, 청하옵건대, 6명을 증가하여 모두 12명으로 하고, 이에 부사정·사용(司勇)의 체아직 한 자리를 더 주어서 분번(分番)을 없애고 상시 그 학업을 닦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 >-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1438년) 7월 6일 무자 3번째 기사 [[조선]] 초기 [[세종대왕]] 시절에 조선에 거주하던 [[여진족]]들 중에도 여진 문자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고, 세종은 이를 보존했다고 한다. [[http://www.newswatch.kr/news/articleView.html?idxno=6394|세종대왕, 여진 문자 폐절을 막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